박우연 씨는 10년 전쯤 남편과 함께 두 딸을 데리고 헝가리로 이민을 갔다. 헝가리는 아주 먼 곳이고, 동유럽이라는 용어의 그늘이 아른거리는 사회주의 때문에 낯설었으며, 조금 거칠게 느껴지는 발음의 언어까지 생소했다. 한두 달 지나자 주변 생활에 조금씩 적응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가장 신기하게 여긴 것 중 하나가 물건 사는 습관이었다.
시장에 사과를 사러 갔다. 사과 장수 할머니 앞으로 장바구니를 든 여성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런데 물건을 고르는 방식이 우연 씨가 서울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달랐다. 만 원에 사과 일곱 개라 치자. 보통이라면 쌓여 있는 사과 중에서 빛깔과 크기가 마음에 드는 것으로 일곱 개를 고를 것이다.
그런데 부다페스트에선 할머니가 골라 담아 주는 사과만 받아 와야 했다. 할머니는 깨끗하고 잘 익은 사과 두 개, 그저 그런 정도의 사과 세 개, 흠집이 많고 찌그러져 제대로 팔릴 것 같지 않은 사과 두 개의 비율로 잘 배분해 팔았다. 항상 그랬다.
몇 개월이 더 지나자 우연 씨도 헝가리 말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생활에 필요한 웬만한 표현은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자, 자신감도 그만큼 더 생겼다. 하루는 작정을 하고 사과를 사러 갔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그녀 차례가 되었다. 할머니가 바구니에 그날의 분배 방식에 따라 사과를 담고 있을 때, 그녀는 준비했던 말을 또박또박 건넸다. 마치 회화책을 읽어내려 가듯이.
"할머니, 돈을 더 드릴 테니 이쪽 좋은 사과로 일곱 개 주세요."
모든 일은 우연 씨가 오랫동안 별렀던 그 말 한마디가 덜어지기 무섭게 한꺼번에 일어났다. 할머니는 잽싸게 우연 씨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빼앗아 담긴 사과를 쏟아 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뒤에 선 아주머니에게 손짓을 했다. 눈짓 하나로 그녀를 밀쳐 낸 할머니의 표정엔 경멸의 기운이 가득했다. 할머니의 표정은 비록 잛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충격이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너무 창피해서 잠시도 그 자리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와서도 두 볼은 여전히 화끈거렸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사과를 먹지 않고 한 달 정도 지냈다. 과거의 무안은 조금씩 잊혔고, 잃었던 용기도 약간 되찾았다.
위층에 사는 아주머니에게 그대의 정황을 설명하고, 자기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물었다. 이웃 아주머니는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니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그런 식으로 먼저 온 사람이 좋은 사과를 다 사 버리면, 나중에 온 사람은 무엇을 가지게 되느냐고.
경쟁과 승리라는 좌표계 속에서 자유시장주의라는 상식에 도취한 사람들은 강장제 대신 숙취 해독제를 음용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부다페스트의 사과 장수 할머니로부터 간단한 교육을 받아도 좋다. 할머니가 부재중이면, 박우연 씨를 찾아가도 목적을 이룰 수 있을 터이다.
이제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다니는 우연 씨의 그 당혹스러웠던 경험담의 마지막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그것이 제가 여기 와서 처음으로 겪은 사회주의의 흔적이었어요."
- "상식의 힘 - 부다페스트에서 사과 사기" 본문 55p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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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내 생각이.. 우리의 생각만이 옳다는 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생각을 고집하고.. 강요하고 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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