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Books/발췌2009. 9. 25. 09:50

양주동의 수필 <몇, 어찌>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영리한 소년이 드디어 신식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신동이란 칭찬까지 듣고 있었으니 자못 새로운 학문의 세계에 대한 기대가 컸다.


소년은 개학 바로 전날 예습을 하기로 했다. 시간표를 보고 첫 시간 과목의 교과서를 빼 들었는데, 이름 하여 '기하'였다. 소년 양주동은 당황했다. 그래도 이렇다 할 한학 서적을 모조리 떼고 신학문이라 하여 입문하려는데, 한자로 된 과목의 의미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 '기(幾)'에, 어찌 '하(何)'. 한문 실력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는데, 단 두 자 앞에서 막혀 버린 꼴이었다. 교과서 표지에서 멈춘 예습은 결국 책장을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한 채 끝났다. 소년은 '몇, 어찌'만 머릿속으로 되뇌다가 온밤을 하얗게 새고 말았다.


기다리던 천 시간이 왔다. 기하 선생과 인사를 끝내기가 무섭게 소년은 질문이 있다면서 손을 들었다.


"선생님, 기하가 무슨 말입니까?"


어쩌면 첫 질문으로서는 가장 적절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기하학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땅을 측량한 데서 기원했고, 아르키메데스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기하학을 영어로는 '지아미트리(geometry)'라 하는데 'geo'는 토지를, 'metry'는 측량을 의미한다. 중국이 이 학문을 받아들이면서, 영어 발음의 앞부분 '지아'만 따서 한자로 음역한 것이 바로 '기하'였던 것이다.


소년은 눈앞이 밝아지고 가슴이 뚫리는 것 같았다. 기하의 어원은 어떤 기하학 시험에도 나올 리 없지만, 그것은 하나의 전문지식을 근본적으로 익히는 데 유용한 매개가 된다. 돌이켜 보면, 지식을 가르치며서 그것이 잘 이해되고 필요한 곳에 제대로 사용될 수 있도록 소화제나 윤활유 역할을 할 상식도 함께 전달하는 교사가 없지는 않았지만, 결코 많지도 않았다.


- '상식의 힘 - 부다페스트에서 사과 사기(이념의 상식)' 본문 50p 중에서 -

 

이 구절을 읽고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참으로 맞는 말이지 아니한가?

하지만 세상도.. 나도.. 그렇게 굴러가고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서 씁쓸하네...

Posted by HanbajoK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