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든 것이 항상 지속할 것처럼,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자명하고, 삶에 그 어떤 신비도 없다는 듯 살아간다. 죽음은 바로 이러한 미몽의 베일을 찢고, 정작 우리가 이해한 건 하나도 없다는 걸 깨우치러 느닷없이 들이닥친다. 세상만물에는 무한정한 깊이가 있으며, 죽음은 그런 삶이 결코 자연이나 시간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죽음이 각인시키는 유한성이야말로 존재의 어마어마한 차원을 부상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흔히 생각하듯 내세의 차원이 아니라, 지금이 실존의 또 다른 차원 말이다.
그런 뜻에서 죽음 이후에 무언가가 있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지 따지는 일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 된다. 뭔가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차원, 이를테면 너무도 엄청나서 우리 존재가 마냥 하찮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차원이 펼쳐진다는 게 문제이다.
그렇기에 죽음에는, 서글프다기보다는 진지한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울러 끔찍한 측면 또한 존재한다. 원래 삶이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로 그래서 진지하고도 끔찍하다. 그걸 이해한다면 우린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것이고, 아무런 서글픔 없는 충만함을 체험했을 터이다. 하지만 삶의 진지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 받아들이고 체험했기에, 삶이 가져다주는 충만함을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절반의 삶, 그래서 서글퍼진 삶만을 체험해온 셈이다. 그 점이 끔찍하다.
- '슬픈 날들의 철학 - 죽음에 관하여' 본문 57p 중에서 -
우리는 아무것도 잃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물이든 생물이든, 모든 것을 차지하고 간직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항상 불행한 상태이다. 여기서 또한 에픽테토스의 사상이 빛을 발한다. "누가 내 지갑을 훔쳐갔소"라든가 "내 아내를 잃었소"라고 말하지 말라 했던가. 그 대신 "나는 그것들을 우주에 되돌려주었다오!"라고 말하라는 내용이 그의 어록을 간추린 『제요』에 실려 있다. 현명한 충고라 아니할 수 없다. 소유하길 포기한 자는 아무것도 잃지 않을 테니 말이다. 덕분에 그가 사는 삶에는 상심이 있을 리 없다.
- '슬픈 날들의 철학 - 상심에 관하여' 본문 107p 중에서 -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