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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종오는 '맹자'에 등장하는 고자(告子)의 이론에 착안해 인성의 무선무악설(無善無惡說)을 재론한다. 동쪽 둑이 무너지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 둑이 무너지면 서쪽으로 흐르는 물처럼, 인성이란 선한 쪽으로 이끌면 선하게 되고 악한 쪽으로 이끌면 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순이 인의를 창도하자 인민은 인의로 나갔고, 걸(傑)과 주(紂)가 폭정을 이끌자 인민 역시 악해졌다"는 '대학'의 한 구절을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음과 함께, 공맹(孔孟)에 대한 반박으로 삼는다. 사람의 천성이 선하다면 걸주가 폭정을 할 경우 당연히 좇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웠던 논리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으 아무래도 '우물로 들어가려는 아이'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막 우물로 들어가려는 어린아이를 문득 발견한다면 그에게는 당연히 두렵고도 측은한 마음이 일 것이다." 즉 우물로 들어가려는 아이를 본 낯선 사람의 마음에 '측은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종오는 이 주장을 반박한다. 그 문장은 분명히 "출척측은(두렵고도 측은한)이라는 네 글자를 사용했다"면서, 왜 측은(가엾음)만을 말하고 출척(두려움)은 말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거기에 논리상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종오의 논박에 의하면, '측은'한 마음이 있기 전에 먼저 '출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어린아이'가 있기 전에 내가 먼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한다. "우선 내가 있고서야 비로소 아이가 있는 것이다. 즉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니까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우물에 빠질 수도 있고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터이니 두려운 마음이 생길 리가 없다. 내가 없으면 곧 어린아이도 없고, '출척'의 마음이 없으면 '측은'의 마음도 없다."
계속되는 설명에 따르면 어린아이는 '나'의 확대형이고 측은은 출척의 확대형으로, 맹자가 사람들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을 확대하라고 가르친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측은지심은 출척지심을 확대한 것이라는 말을 삼갔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오해를 일"으켰다고 한다. 송대 유학자들은 이 점을 살펴보지 못한 채 측은지심을 인성의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주자학은 봉건적 윤리만 남기고 인간의 욕망을 버리는 데 중점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요즘 읽고 있는 장정일의 공부에 나와 있는 한 부분을 발췌한다.
참으로.. 와닿는 말이다..
아직도 결론 내지 못한,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떤 것이 인간 본연의 심성으로 맞느냐라는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발상의 전환점을 부여해주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