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bajoKhan's Mon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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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는 건 금지되어 있다

from Extraction 2008/05/21 08:46

우리가 악의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은, 선의를 통해서이지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다. 악은 오류가 아니라 결핍인 것이다. 다시 말해 악은 대상과 잘못 맺은 관계라기보다는 그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악의를 굴복시키려면 단순히 생각만 많이 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바로잡는 것이 아닌,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악한 자는 자신의 존재를 상실한 존재이다. 실제로 존재하기 전에 존재하길 바라고,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존재하길 원하다 보니, 아주 약삭빠르기만 한 종자가 되고 만 것이다. 악한 자의 비극은 바로 그 점에 있다. 약삭빠를수록 악해지고, 악해질수록 약삭빠르게 굴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한다.
그러한 체계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치유책밖에 없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저 혼자 가게 내버려두고, 존재하는 것이다. 무얼 앞서 점치려 하지도 말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게 하려고도 않으면서 말이다.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는 『미덕과 사랑』에서 바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열쇠를 쥔 자는 영혼이 단순한 자이다. 이중성을 지닌 괴물을 퇴치할 수 있는 자는 자기 자신과의 합일을 이룬 존재밖에 없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알료샤 카라마조프 같은 인간형이나, 『백치』의 줄거리를 수놓는 단순한 행동, 단순한 영혼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정신이 단순한 이들은 행복할까? 그 말이 곧 정신속에서 단순함을 잃지 않고, 특히 단순성의 정신을 갖춘 이를 의미한다면, 그렇다.
선의와 그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마음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치들로 움직인다. 약삭빠르길 바라는 것이 항상 약삭빠른 것만은 아니다. 약삭빠르다 보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반면 온 마음을 바쳐 사는 것은 삶의 한결같은 토대를 이룬다. 자기 자신과의 이러한 합일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인 내면의 무질서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 '슬픈 날들의 철학 - 마음에 관하여' 본문 271p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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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늙음이란 세상을 향한 서글픈 시선이다. 모순으로 가득 찬 태도이기도 하다. 삶을 부정하면서, 삶을 향해 씁쓸한 비난을 퍼부으면서 삶을 사는 태도이니 말이다. 한계 너머로 본질적인 무언가를 발견할 줄 모른다면, 실패 자체가 곧 본질인 것처럼 고개를 들 것이다.
그와 같은 시선을 '명징함'이라 부른다면, 우린 도처에서 한계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기쁨과 희열을 사장시킬 것이다. 그건 삶에 엄청난 악영향을 행사해, 슬픔이 삶의 심연을 대체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죽음 속으로의 해체 욕망이 뜻하는 바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그냥 몸의 자살이라기보다는, 차츰차츰 몸에 영향을 미치는 마음의 자살을 의미한다. 한데 단지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사물의 실재에 던져지는 서글픈 시선은 이를테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다. 죽음이 슬픔으로 마음을 채우는 이유는, 머릿속에 자기 자신밖에는, 자기가 잃을 것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지금 그대로의 존재, 한계, 그 한계 너머 또 다른 질서로의 이동은 까마득히 무시된다. 그것은 결코 공평한 자세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고집하다 보면, 나쁜 걸 좋게, 좋은 걸 나쁘게 보면서 사물의 질서 자체를 역전시킬 수도 있다.

- '슬픈 날들의 철학 - 늙는 건 금지되어 있다!' 본문 323p 중에서 -
 

한 인간과 죽음을 향해 가는 듯 보이는 그의 인생 사이에는 또 다른 무엇이 존재한다. 삶 그 자체와 더불어 삶의 정신을 살게 하는 가능성이 그것이다. 언뜻 이 세상의 법칙처럼 보이는 슬픔 말고 다른 것을 말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 모두는 두 번의 탄생을 경험한다. 첫번째는 세상 속으로 우리를 오게 하는 탄생, 두번째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탄생이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사는 데만 그친다면, 우리 인생은 미완의 향기로 진동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빠진 건 자유다. 그것을 발견하면 모든 게 달라진다. 삶이란 그냥 살아 있다는 것 이상의 그 무엇임이 판명되면서, 미래가 우리의 이후가 아닌 이전으로 삶의 형태를 띤 채 나타난다. 슬픈 날들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행복한 날들이 도래한다. 두 다리 단단히 버티고, 꼿꼿이 선 채, 두 눈 크게 뜨고 살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 오는 것이다.

- '슬픈 날들의 철학 - 늙는 건 금지되어 있다!' 본문 329p 중에서 -

HanbajoKhan
2008/05/21 08:46 2008/05/21 08:46
Tag // 느낌한구절, 마음, 발췌, 슬픈날들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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